
성장에서 안정으로, 중화학에서 첨단산업으로- 반도체 컬러TV 등 첨단산업 발전의 주역들! ≪한국경제 70년, 그들이 있었다≫ 4부 (KBS 150502 방송)
한국경제 70년, 그들이 있었다 - 4부 “국가에서 시장으로, 한국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다” (2015 05 02 방송)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을 시작으로 80년 정치, 사회적 불안에 대흉년까지 겹쳐 한국경제는 큰 위기에 빠진다 제5공화국 정부는 1981년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며 안정, 능률, 균형을 중심으로 한 경제 안정화 정책을 시행한다 또한 중화학 중복 투자를 조정,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등 한국 경제 시스템의 대대적 개혁에 나선다 성장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 안정화의 기틀을 마련코자 했으며, 중화학공업 중심 산업구조를 넘어 첨단산업을 개발・육성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 주도의 경제 시스템은 시장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1986년 마침내 사상 최초 국제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고, 이후 3년 연속 경제성장률 10%를 기록하며 국제수지 흑자, 높은 경제성장, 물가안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다 당시 세계 경제에 있어 가장 빠른 경제성장 속도였다 그 성장의 중심에는 정부, 기업 그리고 현장 곳곳에서 땀 흘려 일한 근로자들이 있었다 1 한국경제, 성장에서 안정으로 전환하다 ㅇ 제5공화국의 경제대통령, 김재익 80년 10월 청와대 경제수석에 취임한 故 김재익 박사(1938년 11월 26일 ~ 1983년 10월 9일)는 경제기획원 출신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탁월한 설득가였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 과외 선생으로서 ‘5공화국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었다 김재익 수석의 아내 이순자 여사가 회상하는 김재익 수석은 집에서도 국가와 경제성장에 몰두하느라 아이들을 살피지 못했던 ‘빵점짜리 아버지’다 하지만 그의 경제 발전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진심이었기에 가족들은 그를 지지했다 물가 안정, 대외 개방, 전자통신혁명, 금융실명제 등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던 김재익 수석의 정책들에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는 남다른 추진력과 에너지로 많은 정책을 시행해 갔다 83년 버마 아웅산 테러로 세상을 떠난 김재익 경제수석, 3년여의 짧은 임기였지만 그가 한국 경제에 남긴 업적은 80년대 이후 한국경제 성장의 깊은 뿌리가 되었다 2 기업, 정부주도형에서 자립형으로 전환하다 ㅇ 컬러TV 시대의 개막, 전자산업 부흥을 이끌다 1980년 컬러TV 시대의 개막은 한국 경제・사회・문화 곳곳에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전자 산업 발전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진다 정부의 전자산업 부흥 정책과 함께 시작된 컬러TV 시대는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삶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80년대 백색가전 대표 브랜드 금성의 디자이너로 근무했던 심재진 전 소장은 가전제품 디자이너 초기 세대다 그는 당시 국내 전자 산업계는 기술과 디자인 면에서 미국, 일본 등 기술 선진국들을 따라가기 급급했다고 말한다 아류에서 일류로 올라서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절, 힘든지도 모르고 신이 나 일했던 사람들에게 컬러TV 시대는 도전과 실험의 기회를 선사했다 “(당시 디자이너들은) 다들 경험이 없었어요 그래서 사실 저한테 제일 도움을 준 사람들은 디자이너들이 아니라 엔지니어와 수출 영업부서 사람들이었어요 해외에서 좋은 걸 보고 오면 꼭 얘기해주거든요 ”- 금성사 심재진 ㅇ 마이카 시대를 열다 1980년대 중반부터 경제호황에 힘입어 수출뿐만 아니라 내수시장 또한 활기를 띠며 마이카 시대가 찾아온다 80년대 현대자동차 영업부에 입사한 김세진 씨는 하루에 자동차 6~7대를 판매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계약하기에 바빴던 열정의 마이카 시대를 전한다 “(당시로선) 자동차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축복된 일이었거든요, 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행복해지는 그런 큰 꿈을 갖는 거죠 정말 신나게 일했어요 “ - 현대자동차 김세진 ㅇ 대기업, 정부보다 앞서 미수교국과 손을 잡다 80년대 우리 경제가 발전하면서 대기업들은 더욱 높은 수준의 정보력과 자금력을 갖추게 된다 대우건설의 사장으로 활약했던 홍성부 전 사장이 80년대 (주)대우의 탄생 일화를 전한다 대우건설은 70년대 후반만 해도 해외 대형 공사 수주를 위해 정부 차원의 지급보증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5공화국에 접어들며 정부의 재정지원이 축소되었고, 기업은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야만 했다 대우는 자본 규모를 키우기 위해 주력 사업이던 건설과 무역을 합병, (주)대우를 설립한다 이후 (주)대우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당시 미수교국이었던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를 주 무대로 활약하며, 정부보다 앞선 정보력으로 민간외교관의 역할까지 톡톡히 해낸다 “생각해보면 상사도 서비스업이고, 건설업도 서비스업이에요 이걸 합병해 자본금을 키워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면 지급 보증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잖아요 우리만의 정보력을 종합할 수도 있고요 ” - (주)대우 홍성부 3 중화학공업에서 첨단산업으로 전환하다 ㅇ 64K 디램의 탄생, 반도체에서 첨단 미래를 준비하다 5공화국 정부는 반도체, 컴퓨터, 전자교환기 부문을 3대 전략 산업으로 추진한다 5년 안에 전자 부문의 생산 및 수출을 2 5배로 늘리겠다고 발표했을 때 정부 관료를 비롯해 대다수 사람이 코웃음을 쳤다 그로부터 5년 뒤인 86년, 전자산업은 기계산업을 앞지르고 국가 최대 주력산업이 되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을 때, 삼성 故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에서 미래 산업의 기회를 발견했고 개발에 나선다 삼성전자 반도체의 기술 담당이었던 류병일 전 이사는 80년대 미국 마이크론사로 떠난 연수길을 떠올린다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반도체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빼곡히 써내려갔던 25여 권의 일명 ‘류병일 노트’ 1983년 마침내 삼성전자는 첫 64K디램 개발에 성공한다 젊은 반도체인들의 땀과 눈물이 빚어낸 결실이었다 이후 반도체는 한국경제를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한 주역이 되었다 “반도체 초기엔 우리가 모든 걸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거였죠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언제 망하나 싶었을 거예요 “ - 삼성전자 류병일 위기를 넘어 정부, 기업, 국민이 하나가 되어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80년대 대한민국경제, 그 대전환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한국경제 #첨단산업 #경제다큐 #반도체 #TV #칸나 #김재익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