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역사추적 –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2부 : 서동, 선화공주 버렸나? / KBS 2009.3.14. 방송

KBS 역사추적 –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2부 : 서동, 선화공주 버렸나? / KBS 2009.3.14. 방송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인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깨어질 위기에 놓여있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 사리장엄구 발굴로 등장한 또 다른 여인 과연 그녀는 누구이며, 서동과 선화공주 사랑의 진실은 무엇인가? 서서히 밝혀지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담긴 진실과 백제 무왕의 익산경영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 미륵사 서탑 사리 봉안기 속 여인, 사택왕후 2009년 1월, 백제 무왕 때 왕비인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미륵사에 유물들이 발굴됐다 특히 세 개의 탑 중 유일하게 남은 서탑의 사리 봉안기에서 우리가 알던 것과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 그것은 사택왕후라는 새로운 이름과 그녀의 발원사실, 그리고 639년이라는 건립연대였다 사택씨 집안은 백제 8대 성 중의 하나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사비 백제시대 정계의 중심이었다 이것은 사택지적비문에도 확인할 수 있는데, 금으로 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보탑을 세웠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사택가문의 경제력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의 소원대로 연못을 메워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허구일까? -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사랑의 진실 무왕은 재위 42년간 12차례나 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신라의 공주와 결혼하기 어려운 배경이다 고대국가 왕실에서 결혼은 철저히 정략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493년, 백제 동성왕과 신라 이찬 비지의 딸이 결혼을 하여 60여년 간 두 나라간의 돈독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 - 무왕의 익산경영과 정략결혼의 의미는? 무왕은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귀족층의 끊임없는 왕권견제로 익산으로의 새로운 경영을 계획한다 익산지역은 무왕이 태어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낮은 구릉과 평야 지역으로 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익산경영 틀의 중심에 미륵사 창건이 있었다 그것은 용의 아들인 자신을 미륵불과 동일시하여 자신을 세상을 구해줄 미륵불로 인식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미륵사의 사택왕후 명문기는 미륵사상이 아니라 석가불을 모시는 법화사상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미륵사에는 왕이 신봉하는 미륵신앙과 제1 귀족세력인 사택 집안이 신봉하는 법화경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추적 14회– 대발견 미륵사 사리장엄 2부: 서동, 선화공주 버렸나(2009 3 14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