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한국의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
일본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한국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 일본의 전설적인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부른 것은 1984년이었다 당시 조용필 가수 노래가 일본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엄밀하게 살피면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시점부터 일본 열도에 크게 퍼져나갔으며 주요한 뉴스였다는 사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영상은 현재까지 2종류의 영상이 알려져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하얀 기모노를 입고 흥이 있는 리듬의 노래를 담은 영상은 1984년 TBS TV 프로그램 영상이다 이어 오늘 소개하는 영상은 1984년 도쿄 테레비(TV TOKYO)에서 제작한 영상으로 추정된다 이 영상의 노래는 하얀 기모노 영상과는 다른 사뭇 진중한 표정과 많은 의미를 품은 느낌이 노래 전반에 담겨있다 필자는 TBS TV 프로그램 영상 이후 부른 노래로 추정한다 필자는 가수가 이렇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정리한다 미소라 히바리 가수는 1981년 어머니 가토 기미에(加藤 喜美枝)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1983년 집안 장남이며 남동생인 가토 데츠야(加藤 哲也)가 이어 세상을 떠난 아픔이 있었다 필자는 다음 해 1984년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듯한 느낌을 오래도록 헤아렸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 중요한 사실이 있다 히바리 가수의 아버지 가토 마스키치(加藤 増吉 1911~196 3)가 1963년 2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이어 가수와 가장 절친한 인물로 당시 일본에 널리 알려진 함경도 태생의 프로레슬러 역도산(力道山, 1924~1963)이 그해 12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연이어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낸 가수는 다음 해 1964년 우리의 민요 도라지를 일본어 가사로 발표하였다 가수는 1946년 9살 나이에 요코하마 이소고 구의 ‘아테네 극장’에서 첫 데뷔 후 43년 동안 자신의 원곡 527곡을 포함한 1,500여 곡의 노래를 불렀다 1989년 52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짧은 한국어 가사의 노래를 부른 것은 일본어 가사 한국 민요 도라지(トラジ)와 일본어 가사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유일하다 가수는 생전에도 분분하였던 재일 한국인 설에 대하여 본인이 공개적으로 명확하게 이야기한 사실은 없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의 전설적인 국민가수로 살다 간 가수의 태생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가릴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진실의 관점에서 헤아리고 살펴야 할 내용이 많다 가수 히바리의 형제는 모두 배우와 가수 생활을 하였던 여동생 사토 세츠코(佐藤 勢津子, 1939~)와 두 명의 남동생인 장남 가토 데츠야(1941~1983)와 막내 카야마 다케히코(1943~1985)가 있다 그중 유일하게 85세의 여동생 사토 세츠코가 생존해 있다 필자는 미소라 히바리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아마도 한국인으로는 가수에 대한 가장 많은 글을 썼을 것이다 내 젊음의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헤아려오면서 꼭 만나고 싶은 두 분이 있다 가수의 여동생 사토 세츠코(佐藤 勢津子, 1939~)와 히바리 가수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76세의 재일 한국인 가수 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 1948~)다 미소라 히바리 가수가 틈틈이 그림을 그린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가수는 1989년 1월 15일 후지TV 뮤직페어 프로그램에 마지막 모습을 보인 후 투병 중에도 그림을 그렸다 (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필자는 가수에 대한 나름 많은 영상을 보았으며 노래를 들어온 관점에서 오늘 소개하는 영상의 노래 시작 전 가수의 눈빛과 표정에서 많은 느낌이 있었다 필자가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이야기를 헤아려오면서 가수의 친족 가계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사실은 충격이었다 상식적으로 평범한 일반인도 몇 대에 이르는 집안의 족보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 역사에 대중의 애환을 거머쥔 자랑스러운 국민가수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공개적인 명확한 자료가 철저하게 없다는 것은 의문이었다 필자는 이에 대하여 살피면서 그럴만한 이유도 있음을 헤아렸다 일본은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시대가 열린 1868년 정부가 도쿄로 이전하기도 전인 10월 시급하게 교토 정부에서 시행된 가사 등록제도가 있었다 이때 에도시대부터 전해오던 사농공상으로 구분된 신분별 인별장(人別帳)을 폐지하면서 근대적인 가사 등록제도를 구현한 것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가사 등록제 이전 호적은 직계 가족도 열람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하였다 옛날 사농공상으로 구분한 신분을 추적할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 기회에 일본의 호적제도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고대 일본의 호적 제도는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여 제반 체제를 혁신한 아스카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670년 덴지 천황이 실시한 일본 최초의 호적인 경오연적(庚午年籍)을 작성한 바탕에서 690년 더욱 구체적인 경인연적(庚寅年籍)이 작성되었다 이렇게 이어온 호적제도는 1192년 세습 군사 정권 가마쿠라 막부 시대가 열릴 때까지 전국적으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침공으로 몰락하면서 남북조 시대가 열려 무로마치 막부 시대가 탄생하면서 지방 영주 다이묘들이 득세한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실질적으로 전국 호적 제도는 무실해졌다 이어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를 이어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력한 중앙 집권 에도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기독교 금지령 속에 1640년 민중의 종교 종파를 정기적으로 조사할 목적으로 생겨난 구체적인 호적이 종문 개장으로도 부르는 슈몬닌베쓰아라타메초(宗門人別改帳)이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 메이지 유신 시대 1872년에 임신호적(壬申戸籍)이 탄생하였다 이는 일본 근대의 전국적으로 시행된 호적으로 종교와 재산에서부터 범죄 이력까지 구체화하였으며 사농공상의 신분에 대한 차별적 기록을 상세하게 작성하였다 일본은 1948년 이러한 차별적 기록을 삭제한 호적 정비작업에 착수하였으며 1952년 주민등록법을 제정하여 1967년 호적과 연계한 주민등록제도를 시행하였다 이후 1976년 새롭게 정비된 호적등본을 본인의 열람만 가능하게 하였다 일본은 1970년 신분이 기재된 구 호적을 영구봉인하면서 당시 각 지방에 보관된 자료에 대하여 일본 법무성의 폐기를 알리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결론은 일본의 구 호적은 봉인되었다가 폐기되었지만, 신분의 분류와 개인의 불 이익적인 기록이 사라진 것이지, 실체적 인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에 일본의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명확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오랜 인류사에 태어나 외계에 뼈를 묻은 이가 없으니 모두가 지구 행성인인 까닭에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의 전설적인 국민가수로 살다 간 가수의 태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가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소중하게 불러준 일본 국민 가수의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은 할아버지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과 증조할아버지는 아예 부재한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이일영(한국미술센터 관장 칼럼니스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