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수원화성, 날씨 좋은김에 일주하기, 13부, 동북노대에서 동암문까지, 동북공심돈과 보방의 요새시설성형요새의 관계, 수원성이 아닌 화성이라고 불리는 이유, 해외여행소매치기

세계유산 수원화성, 날씨 좋은김에 일주하기, 13부, 동북노대에서 동암문까지, 동북공심돈과 보방의 요새시설성형요새의 관계, 수원성이 아닌 화성이라고 불리는 이유, 해외여행소매치기

00:00:14 난 그래도 해외에서 한번도 털린적은 없어요 근처에 온 적도 없는 것 같아요 내가 항상 경계하고 다녀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00:00:26 그놈들도 훔쳐갈 사람만 딱 찝어서 털더라구요 떨어진 사람들을 주로 하고 한번 털린사람들은 계속 털린다더라고요 00:00:32 00:00:35 전 노출빈도가 많아서 그랬는지 두 번이나 털렸거든요 00:00:42 이탈리아에서 한번, 캄보디아에서 한번 00:00:47 나와바리에서 털렸네 00:00:49 사람을 딱 보고 지정해서 계속 관찰하다가 턴다고 하더라고 대상물색해서 00:00:57 캄보디아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탈리아는 되게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00:01:05 이탈리아에 대한 이미지가 안좋아져서 다신 가고싶지도 않아 ㅎㅎ 00:01:10 근데, 그 사람들 이탈리아 사람도 아니야 00:01:12 대부분 집시라서 전유럽을 헤매는 사람들인데 다 ㅎㅎ 00:01:18 앞에 보이는 동북노대는 기계식 활인 노를 쏘기 위해 지은 시설이다 별도의 높다란 대를 만들지 않고 성벽에서 돌출시켜 만들었지만 주변이 평탄해서 시야가 확보되었다 노대와 좌우 성벽이 만나는 지점을 살짝 좁혀 쌓았는데 화성성역의궤에서는 그 모양을 '벌의 허리'와 같다고 표현했다 00:01:38 00:01:40 난 프랑스 몽마르트언덕에서 같이갔던 팀장님이 흑인들하고 시비가 붙어서 진짜 칼부림 날 뻔했어요 00:01:45 (동북노대 올라갑니다) 00:01:48 흑인이 손목에 팔찌를 채우고 사라고 협박하는데, 우리 팀장도 덩치가 밀리지 않아요 키가 한 백구십 정도 됐거든요 아저씨인데 00:02:02 그래서 팀장이 좀 뭐라고 했지 00:02:05 그랬더니 주위에서 흑인들이 막 몰려오는 거야 00:02:09 그래서 우리 일행들이 다 겁나 가지고 막 도망간 적이 있어요 00:02:14 동북노대 안 00:02:18 이건 뭐지? 타겟인가? 00:02:21 그러네요 (유지보수를 위해) 측정하는 거네요 00:02:23 동북노대 잘 봤구요 00:02:39 00:03:19 동북공심돈은 화성 동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00:03:30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동북공심돈은 성벽 안쪽에 설치했다 00:03:38 외벽에는 밖을 감시하고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을 곳곳에 뚫었다 00:03:42 동북공심돈은 3층으로 이루어진 원통형의 벽돌 건물로서 출입문에서 통로를 따라 빙글빙글 올라가면 꼭대기 망루에 이르는 구조다 이 모습을 빗대서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정조 21년인 1797년 정월, 좌의정 채제공은 동북공심돈을 올라가 본 뒤 “층계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어 기이하고도 교묘하다 ”며 감탄했다 00:04:05 한국전쟁 등을 겪으며 절반 이상 무너졌었는데 1976년에 복원해 모습을 되찾았다 00:04:12 앞서 언급했다시피, 수원 화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설계된 성곽이다 정약용이 입수한 동서양의 기술서는 대부분 중국을 통해서 입수되었는데, 17세기에 활약한 공학자 '보방'의 요새시설을 포함한 서양의 성형요새가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보방의 요새시설'의 OUV 2번에는 '극동 지역에서 보방의 성채 형태를 요새의 모델로 사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00:04:41 보방의 요새시설은 이전 시기의 성형요새에 비해 많은 부분을 발전 시켰는데, 그중 동북공심돈과 같은 원형의 포루가 있다 한반도에서 수원화성 이전의 모든 성에서 동북공심돈 같은 형태의 포루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북공심돈의 형태와 '보방의 요새시설'의 포루는 심층적인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및 프랑스의 성형요새를 답사하면서 수원화성과의 유사성을 많이 느꼈고, 그중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공심돈과 원형포루였다 동북공심돈은 그런 점에서 서양의 기술이 동양에서 변화하여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00:05:17 위키나무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돌로 된 성벽은 포탄에 하나가 깨어지면 그대로 성벽이 붕괴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벽돌로 지은 성벽의 경우 포탄이 착탄한 부분의 벽돌만 깨질 뿐 나머지 벽돌은 온전하기 때문에 성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조선까지 전해져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데에 적용되었다 00:05:38 하지만, '벽돌로서 성을 쌓는건 중국식 성곽의 특징이기도 하였으며 수원화성 전체를 벽돌식으로 쌓으려 했던 정약용은 벽돌 사용의 근거를 중국에서 찾았다 '라는 내용도 있다 현재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수원화성의 설계에 참고된 서양과 동양의 자료가 어떤 것들이고 어떻게 참고되었는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00:06:03 동북공심돈에서 동장대로 가는 길~~~ 00:07:29 지금 들어온 동장대는 장수가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곳으로 ‘연무대’라고도 불린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 훈련 지휘소로 썼다 00:07:48 동장대는 대지 전체를 3단으로 나누고 마당 한가운데에 장수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었다 본래 전면은 개방하고 나머지 삼면은 벽이나 창문을 단 형태였으며, 가장 안쪽에 온돌방 한 칸이 있었다 건물 뒤쪽으로는 수키와로 담장을 꾸민 영롱장이 있다 00:08:07 정조는 동장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내려주는 호궤 행사를 베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시기인 1796년 8월 19일, 감독관과 일꾼 등 2700여 명이 호궤에 참여했다 00:08:21 00:08:40 동장대의 한켠에 전시된 것들 입직군사의 하루, 임금이 행차할때, 동장대에는 낮에는 장수 2명 군졸 4명이 근무를 섰다 입직군사는 구군복에 칼, 활, 죽시, 지휘봉을 착용했다고 한다 환도, 협도, 각궁, 궁대 활 주머니, 죽시, 시복 화살주머니, 군패, 수문규칙이 전시되어 있다 00:09:02 00:09:26 동장대 밖으로 나왔다 00:09:31 00:09:45 오~~ 많이 걸었네요 우리 00:09:46 그런데, 왜 화성은 화성이라고 부를까? 수원이면 수원성이라고 불러도 될텐데 말이다 화성문화원의 자료를 참고하여 알아보자 00:09:56 1789년 정조는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를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에서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인 화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화산 지역에 있던 읍치는 수원의 팔달산 밑으로 옮기고, 수원부를 화성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00:10:14 정조는 1794년부터 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 전 해에 수원을 ‘화성’이라 부르고 유수부로 승격시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39권 정조 18년(1794년) 1월 15일자 화성 축조와 관련된 정조의 말씀에는 ‘화성’이라 부르게 된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00:10:32 현릉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는 유천이다 옛날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 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華)자와 화(花)자는 서로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라 마치 꽃송이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00:10:53 여기서 화 사람이 요 임금에게 세 가지 축원을 올린 것을 가리켜 화봉삼축이라 하며, 그 내용은 장자 천지편에서 유래된 것이다 화봉인(화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하였는데, 화봉인이 말하기를, 00:11:07 “성인(요임금)에게 축원하오니, 오래 사십시오 ” 하니, 요 임금은, “싫다 ” 하였다 00:11:14 이어 화봉인이, “부자가 되십시오 ” 하니, 요임금은 다시, “싫다 ” 하였다 00:11:22 이어 화봉인이, “자식을 많이 두십시오 ” 하니, 요임금이, “싫다 ” 하였다 00:11:32 그러자 화봉인이, “수ㆍ부ㆍ다남은 모든 인간이 바라는 바인데, 혼자서 마다 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00:11:40 00:11:41 이에 요 임금은, “다남은 걱정이 많고, 부는 일이 많으며, 수는 욕됨이 많다 따라서 이 세 가지는 덕을 기르는 소이가 아니다 ” 라고 대답하였다 00:11:52 즉 이 화봉삼축이라는 고사가 강조하는 바는 부나 장수, 자손 등 평범한 세인이 바라는 차원을 넘어서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덕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잇다 따라서 정조가 이 고사를 취하여 성의 이름을 화성이라 부여한 것은 결국 덕을 기리는 고을이 되라는 깊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00:12:11 지금 보이는 시설은 동암문이다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00:12:24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 시 계단을 추가했다 00:12:31 13부는 여기까지, 14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