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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마가복음11장1-10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과 환호하는 무리들/churchonahill.org
마가복음은 세 단락으로 구별되는데 첫 번째 단락은 갈릴리와 주변의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를 중심으로 한 사역이었고 두 번째 단락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사역이었습니다. 11장은 세번째 단락의 시작 부분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많은 무리 가운데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차례 예루살렘에 가신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번에 걸쳐서 예고한 대로 며칠만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이기에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에 특별한 준비를 하십니다. 두 명의 제자를 마을로 보내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과 ‘나귀새끼’를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는 첫 번째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입니다. 구약시대에 부정한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정결예식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특별한 제물이어야 했습니다. 반드시 흠이 없어야 했고(레22:20)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여야 했습니다(민19:2).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길 때에도 멍에를 메어 본 적이 없는 소 두 마리가 끄는 수레에 싣게 했습니다(삼상6:7).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어질 소는 특별해야 했기에 인간을 위해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멍에를 맨 적이 없는 소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타고 가야 할 나귀새끼는 특별해야 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나귀새끼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강조하신 것은 ‘나귀새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9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왕이 자신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왕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 죄인 된 우리를 죽기까지 섬기신 겸손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왕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자신의 사역을 감추었던 것은 사람들의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속적인 기대감을 갖는 사람들의 잘못된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역을 감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세상에 알려야 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죄인 된 우리를 죽기까지 섬기는 왕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주요,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나귀 새끼를 타셨기 때문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입니다. 공의와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롬5:18). 예수님께서 두 명의 제자를 보내시며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을 때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듣고 나귀새끼를 끌고 가도록 허락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외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후에 예수님의 사역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고(막14:8),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과 그 집 주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을 할 수 있도록 큰 다락방을 제공했습니다(막14:13-15). 아리마대 요셉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내려 세마포에 싸서 바위 속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막15:46).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힘입어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있는 사람(고전12:3),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들을(빌2:11) 통해서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스가랴 말씀에 따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은 왕의 입성을 준비하며 환호했습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얹어 예수님을 앉게 했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과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그들의 환호 소리와 외침은 시편 118편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외친 ‘호산나’는 구원해달라는 외침이었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외침이었고, ‘우리조상 다윗의 나라’는 강성했던 다윗의 왕국을 소망했던 외침이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보여준 경의감과 외침을 볼 때, 스가랴서 말씀과 시편 말씀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속에는 전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공의와 구원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 세울 다윗의 나라를 과거 다윗이 이스라엘의 땅을 넓히고 강력한 나라를 세웠던 것처럼 유대가 회복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보인 행위와 외침은 정당한 것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무지의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붙잡혀 고난 받으시고 죽으실 때, 제자들은 도망했고(막14:50) 무리들은 소리 높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막15:13). 우리들도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는 많은 무리들처럼 정당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행위와 목소리 높인 찬양은 참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처럼 겉과 속이 다른 거짓된 행위와 찬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삼상16:7).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마음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의도를 아시는 분입니다(대상28:9). 우리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하기 전에 예수님을 소리 높여 부르고 찬양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사실을 믿는 우리들이 할 일은 주가 쓰시고자 할 때 주가 쓰실 수 있도록 기꺼이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예수님께 경의를 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