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속의 고향 (C) / 드보르 작 작곡  하모니카 연주

꿈 속의 고향 (C) / 드보르 작 작곡 하모니카 연주

드보르자크는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서 9월 8일 태어났다 바그너(독일)의 「리엔치」가 초연되어 승리를 얻은 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여인숙 겸 정육점을 경영했으며, 안토닌은 그 장남으로 4명의 동생과 3명의 누이 동생이 있었다 집안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아버지는 그에게 가업을 잇게 할 계획으로 13세 때부터 리만(Antonín Liemann)에게 독일어를 배우게 했다 그런데 리만은 또 유능한 음악가이기도 해서 안토닌도 어느 사이엔가 어학 외에 악기와 음악 이론을 배우고 작곡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음악가로서 입신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말았다 프라하의 음악수업 1857년(16세)에 다행히 친척의 경제적 원조도 있어서 프라하에 나가 오르간 학교에서 엄격한 기초 교육을 받게 되었다 1859년(18세) 졸업, 얼마 동안은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한 어려운 생활이 계속되지만, 작곡 공부는 게을리하지 않아 주로 베토벤(독일)을 연구하면서 실내악과 교향곡의 습작에 힘쓰고 있었다 그 무렵 선배 스메타나(체코)는 민족 음악 운동을 개시, 1862년에는 국민극장의 오페라극장 관현악단이 발족됐다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는 이 관현악단에서 비올라 주자로 활동했는데, 스메타나(체코)의 민족 오페라를 연주한 체험은 그의 창작 의욕을 크게 북돋웠다 또한 자주 접하던 바그너(독일)나 리스트(헝가리)의 음악도 그때까지의 창작 태도를 진지하게 반성시키는 것이었다 「찬가」의 성공과 결혼 이렇게 오페라에 심취한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는 「알프레드」(1870)를 비롯, 몇 개의 오페라를 썼지만 어느 것이나 실패로 끝나고 만다 오페라 외에도 「교향곡 제1번」, 「교향곡 제2번」(1865)과 몇 곡의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이 완성되었는데, 1872년(31세)에 완성한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찬가」는 대성공을 거두고, 드디어 독자적인 어법에 의해 인정받게 되었다 이 대성공은 또 이전부터 사모하고 있었던 알토 가수 안나 체르마코바(Anna Čermákova)와의 결혼까지도 가능케 했다 이 기회에 극장 관현악단의 비올라 주자를 그만두고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취임해 보다 많은 창작 시간을 갖게 되었다 새생활에 들어간 그의 창작 활동은 매우 왕성해져 간다 열린 빛나는 문 1875년(34세)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 자금의 시험을 치렀는데 심사원 브람스(독일)와 한슬릭에게 인정받아 합격, 유럽 악단에 빛나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브람스(독일)는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의 독자적인 슬라브 양식을 높이 평가하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 변치 않는 우정으로 맺어진다 결혼 이래 이미 「제5번」까지의 3곡의 교향곡, 「현악 세레나데」(1875) 「모라비아 2중창곡」(1876) 등의 민족적 작품을 완성해 온 그에게 출판사 짐로크(Simrock)로부터 「슬라브 무곡」(관현악곡)의 의뢰가 있었다 이것도 브람스(독일)의 추천에 의한 것이며 1878년(37세)에 출판된 그 「제1집」은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의 이름을 일약 세계에 넓혔다 특히 영국에서 호평이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1884년을 필두로 종종 방영 연주 여행이 행해진다 이러한 순조로움 속에서 장녀를 포함한 세 아기의 잇딴 죽음으로 침통한 그는 「스타바트 마테르」(성악곡)(1877)를 작곡했는데, 슬픔을 성모에게서 찾아낸 명작 칸타타로서, 각지에서의 초연은 어느 것이나 대성공이었다 오페라는 계속해서 썼으나 그리 호평을 받지는 못했으며, 걸작 「교향곡 제8번(교향곡)」(1889)과 독자의 형식에 의한 피아노 3중주곡 「둠키」(실내악곡)(1891)가 슬라브적인 색채가 짙은 이 시기의 정점을 쌓고 있다 신세계 미국으로 1890년(49세)부터 이듬해에 걸쳐서는 슬라브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광의 해로서, 각지로부터 칭호나 훈장의 수여가 있었으며 프라하 음악원 교수로도 취임했다 그러나 1892년(51세) 미국 내셔널 음악원의 초청으로 조국을 떠나, 음악원장으로 취임해서 새로운 미국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가 흑인 영가에 주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음악원에서는 인종 차별을 하지 않아 흑인 학생과 친하게 사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인이나 인디언의 음악과 슬라브 음악과의 멋진 결합은 도미 후 최초의 작품인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교향곡)(1893)였다 이 곡은 미국인의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도 갖고 있어서 그 초연은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국에서의 대성공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더욱더 느끼게도 했다 현악 4중주곡(실내악곡) 「아메리카」(1893), 「첼로 협주곡 b단조(협주곡)」(1894) 등 흑인의 애수와 보헤미아에의 향수를 담은 명작은 이것을 뒷받침하듯이 2년 동안 잇따라 완성되었다 만년 1895년(54세) 그리운 고국에 간신히 돌아온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는 또다시 프라하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창작을 계속했다 그러나 교향시를 중심으로 하는 이 기간의 작풍은 바그너(독일)나 리스트(헝가리)풍으로 새로운 맛이 없었으며, 마지막 작품이 된 오페라 「알미다」(1903)는 또다시 실패였다 이 무렵 자주 몸의 상태가 나쁨을 호소하고 있었던 그는 마침내 뇌졸중에 쓰러져 1904년(63세) 5월 1일 프라하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국제적인 민족주의 음악 체코의 민족주의 음악은 스메타나(체코)에 의해 개척되고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에 의해 국제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교향시나 오페라에 민족주의 리얼리즘을 정립한 스메타나(체코)에 대해, 브람스(독일)풍의 신고전주의를 지향한 드보르자크(체코슬로바키아)의 민족주의는 스스로 다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에 체류중 인디언이나 흑인 음악에서 동정과 공감을 발견하고 쓴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교향곡)나 「첼로 협주곡」에서 그 느낌이 깊다 거기서는 적극적인 체코 민족음악의 울림은 들리지 않고, 오히려 향수의 감미로움에 대한 도취조차 엿보인다 이러한 절충적 민족주의가 그의 음악을 세계적으로 넓힌 커다란 원인이었는데, 국제적인 인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본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진면목은 역시 「교향곡 제8번(교향곡)」이나 피아노 3중주곡 「둠키」(실내악곡) 등의 구성적인 작품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가 열중했던 오페라 분야에서 걸작을 낳지 못했음은 불행한 일이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