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팀장] 약국 찾아 무면허 운전…'긴급피난' 주장 통할까? / KBS 뉴스7 대전 세종 충남 - 7월 8일 (목)
앵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사고의 뒷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보는 사건팀장 시간입니다. 성용희 사건팀장, 오늘은 어떤 사건입니까? [기자] 네, 살다 보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법규를 위반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죠. 이를 테면 아픈 가족을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갈 때 급한 마음에 교통신호를 위반하는 경웁니다. 이럴 때 경찰에 적발되더라도 급박한 상황을 피하려고 어쩔 수 없이 취한 행위, 즉 '긴급피난'으로 인정되면 처벌을 면해줍니다. 저도 어렸을 때 코피가 심하게 나서 부모님 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에 갈 때 이런 경험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무면허 상태에서 급히 약을 타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는 한 남성과 이 남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앵커] 눈이 갑자기 아파서 약국에 가려고 무면허로 운전을 했다, 방금 이야기한 긴급피난에 해당될 것 같기도 한데 이 남성 어쩌다가 법정에까지 서게 된 겁니까? [기자] 네, 지난해 10월이었습니다. 62살 이 모 씨는 대전의 한 공사현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왼쪽 눈에 염증으로 극심한 통증이 생겼고 급히 약을 타러 가기 위해 1톤 화물차 운전대를 잡았다고 합니다. 본인 차였지만 이 씨는 면허가 없는 상태였는데요. 그동안은 함께 일하는 동료가 대신 운전을 해줘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면허로 차를 몰았는데, 한 교차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앞차를 들이받았습니다. 이 사고로 앞차에 타고 있던 30대 여성은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고요. 이 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처리법상 치상과 무면허 운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앵커] 무면허 운전도 문제지만, 거기에 사람이 다치는 사고까지 낸 거군요. 법정에 선 이 남성, 어떻게 됐습니까? [기자] 네, 1심 법원에서 이 씨는 눈이 아파 약국에 가던 중 접촉사고가 났다며 이런 사정을 참작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앞서 이 씨가 여러 차례 무면허로 운전한 전력이 있었고, 특히 2년 전에도 무면허 운전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아직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점을 반영해 징역 4개월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씨는 곧바로 항소했는데요. 앞서 이야기 한 긴급피난을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사고 전날 병원에서 '각막 이물 제거' 시술을 받았고, 극심한 통증이 생기자 처음엔 택시를 타려고 했는데 마스크를 차고 있지 않아 승차를 거부당하자 어쩔 수 없이 차를 몰았다는 겁니다. 또 사고를 낸 것도 통증으로 브레이크를 잠깐 놓친 것 때문이어서 불가항력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앵커] 긴급피난이었다는 이 씨의 주장, 항소심 재판부는 어떻게 판단했나요? [기자] 네, 항소심에서는 이 씨의 주장을 꼼꼼히 살폈는데요. 먼저 형법 제22조 1항을 들어 긴급피난이란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의 위급하고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로 규정된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 이런 '상당한 이유가 있는 행위'에 해당하려면 피난 행위가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어야 하고 피난 행위로 인한 이익이 피해보다 커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피난 행위 자체가 사회윤리나 법질서 전체의 정신에 비춰 적합한 수단이어야 한다며 엄정한 잣대를 제시했습니다. [앵커] 법에서 규정한 요건들을 보면 긴급피난으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아 보이네요. [기자] 네, 재판부도 이 씨가 각막 이물 제거 시술을 받은 점은 인정했지만, 다음날 근무지인 공사현장에 가면서도 점안액 같은 약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갑자기 약을 사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택시들이 승차를 거부해 어쩔 수 없이 운전했다는 이 씨의 주장에 대해서도 코로나19 시국에 마스크 없이는 택시 이용이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또 이 씨의 말대로 눈에 갑자기 극심한 통증이 생겼다고 인정하더라도 주변을 잘 살펴야 하는 자동차 운전 특성상 차량을 운전한 것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씨가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 브레이크를 놓쳐 사고를 냈다고 했는데 기어 변속기를 중립이 아니라 주차에 두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고 판시했습니다. 2심 재판부는 이런 점을 고려해 이 씨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과 같은 징역 4개월 선고했습니다. [앵커] 이번 사건을 보면 긴급피난이라는 게 쉽게 인정되지도 않고, 또 법 질서를 위해서 함부로 주장해서도 안 될 것 같아요. [기자] 맞습니다. 법원이 이렇게 까다롭게 긴급피난을 판단하는 건 이런 행위로 인해 다른 사람의 이익이 침해받을 수 있고 또 사고 우려까지 있기 때문인데요. 가장 좋은 방법은 119나 112에 신고해 공적인 도움을 받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대전에서 차를 타고 있던 갓 난 아기가 고열이 나 의식까지 잃었는데, 아이 엄마가 곧장 보이는 경찰 지구대를 찾아가 순찰차로 무사히 병원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만일 정말 위급해서 법규 위반을 해야 하나 고민할 상황이 온다면 이런 행동이 유일한 방법인지, 더 큰 피해를 초래하진 않을지 신중히 생각하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