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연인들,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연인들에 대한 다양한 일화등을 통해 카이사르의 여성관을 살핀다.

카이사르의 연인들,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카이사르의 연인들에 대한 다양한 일화등을 통해 카이사르의 여성관을 살핀다.

부정이 의심된다는 의혹만으로도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이혼하였던 카이사르는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킨나의 딸인 코르네리아와의 이혼을 거부하고 도피를 선택할 만큼 신의가 있는 인물이었다 한편 나중에 클레오파트라와의 사랑에 빠져 분별을 잃고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안토니우스와는 다르게 사랑과 국가경영이라는 대국을 분별할 줄 알았고 친아들인 카이사이온 보다는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을 후계자로 삼는 냉철함을 보여 이후 로마제국의 번영을 이룬다 카이사르의 여인들 카이사르는 집정관인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16세인 BC 84년에 결혼하였습니다 킨나는 민중파 지도자로 원로원파인 술라가 오리엔트로 원정을 나갔을 때 아프리카에 망명중이던 마리우스를 불러들여 함께 권력을 잡았습니다 마리우스는 평민 출신으로 7번에 걸쳐 집정관을 지낸 인물로서 카이사르의 고모부이며 무산계급을 군인으로 보충하는 등 군대개혁을 실시하고 독수리문장을 군대의 상징으로 지정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한 민중파의 거두입니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로마로 60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가 100명이 넘는 술라파 귀족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후 술라가 로마로 돌아와 2년간의 내전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이후 살생부를 작성하여 마리우스파를 철저히 처형하고 탄압하였습니다 마리우스의 처조카이고 킨나의 사위로서 18세의 카이사르도 살생부에 들어있어 처형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고 킨나의 딸과 이혼하라는 강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강요를 거부하고 소아시아로 도피하였습니다 아내였던 코르넬리아가 BC 69년에 죽은 후 기원전 67년에 33세의 나이에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였습니다 결혼하고 5년이 지난 기원전 62년 카이사르가 법무관 지금의 대법관이었던 시절에 남자는 출입할 수 없는 보나 데아 제사가 카이사르의 관저에서 열렸다 보나 데아는 다산과 순결의 여신으로 고대 로마의 결혼한 여성에게 숭배되었습니다 12월 4일 열리는 제사에는 여성만이 참석할 수 있었고 제물로 바쳐지는 제물도 수컷은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남성의 출입은 엄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곳에 바람둥이인 클라우디우스라는 귀족청년이 여자로 변장하고 몰래 입회하여 카이사르의 아내 폼페이아를 유혹하였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었으나, 막대한 뇌물과 협박으로 석방되었습니다 당시 집정관을 지냈던 키케로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였고 이것에 원한을 품은 클라우디우스는 4년 후 호민관이 된 후 키케로를 범죄자로 몰아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태워버렸습니다 이러한 악행을 한 클라우디우스는 결국 몇 년 후 피살됩니다 한편 카이사르는 보나 데아 제사 사건 당시 명문가인 클라우디우스 집안과 원한을 맺는 것을 꺼려하여 클라우디우스에 관련한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으나 이후 카이사르의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된다는 명목으로 폼페이아와 이혼하였습니다 또한 주목되는 카이사르의 연인은 후일 카이사르의 암살에 가담한 브루투스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가 있다 그녀는 유명한 정치인인 카토의 의붓누이였는데 카이사르의 정적인 카토가 원로원 회의 도중에 카이사르에게 전달된 쪽지를 보고 카이사르가 반역에 연루된 증거라며 카이사르에게 그쪽지를 큰소리로 읽어보라고 요구하였던바 결국 그 쪽지는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에게 전한 연애편지인 것으로 밝혀져 망신을 당하게 되는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카이사르의 오랜 연인이었다 카토는 카이사르와 끝까지 대립하였던 인물인데 폼페이우스가 죽은 이후 아프리카에서 재기를 도모하는 상황에서 폼페이우스를 따르던 병력들이 중요한 전투인 아프리카의 탁수스전투에서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하게 됩니다 한편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피신하자 그를 추적하여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도착하였고 이 곳에서 아름답고 지성미 있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만나게 된다 18살때 8살 어린 동생과 이집트를 공동통치하도록 유언받았으나 섭정들의 개입으로 권력을 잃고 있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힘을 빌어 권력을 되찾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눈을 피해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카이사르에게 선물되는 양탄자 속에 들어가 카이사르를 만나, 카이사르를 유혹하였다고 하며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는 카이사이온 (작은 카이사르) 라는 아들이 생겼습니다 당시 클레오파트라는 21세 카이사르는 52세로 31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후 카이사르가 로마로 개선하게 되었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들과 함께 로마에 들어가 카이사르의 별장에서 머물렀습니다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지 않고 동거만 하고 있는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불의의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내심 자신과 카이사르의 사이에서 낳은 카이사리온에게 로마의 권력승계를 기대하였으나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공개된 유언장에서는 그녀와 아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크게 실망한 상태에서 이집트로 돌아가게 됩니다 훗날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권력싸움에서 가장 유력하였던 안토니우스와 기원전 37년에 결혼하여 이집트의 융성을 도모하였으나 결국 악티움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안토니우스의 죽음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카이사르의 경우 자신을 배신한 여인에 대하여는 냉혹하였지만 단순히 권력을 탐하여 고립무원의 자신의 여인을 배신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기의 미인이라고 불리는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랑과 국가운영을 분리할 줄 알았던 그는 풍류가 많은 사람이었으나 절제가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교훈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정숙한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는 등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로마시민의 분노를 사게 되고 결국 악티움해전의 패배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에 반하여 카이사르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조강지처를 버리지도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카이사르의 부인은 부정하다는 의심을 받는 것도 안된다며 스캔들에 연루된 부인과 이혼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세기의 미인인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을 하면서도 사랑에 빠져 국가경영에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은 뜨겁게 하지만 절제와 분별을 갖춘 사랑으로 자신을 지키고 주변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네이버 블로그 주소 :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카이사이온 #브르투스 #술라 #마리우스 #킨나 #코르넬리아 #폼페이아 #키케로 #탁수스전투 #이집트 #로마 #악티움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