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고소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소크라테스가 고소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전 400년이 저물어갈 무렵 아테네에 사는 멜레토스라는 사람이 당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근거는 억지스러웠고, 요구한 벌은 허무맹랑할 정도로 과도했다 일흔 살의 소크라테스가 고대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젊은이들까지 타락시킨다고 비난하면서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명성만 자자했을 뿐 학자의 이상적인 삶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거지와 겉모습, 생활 방식을 보면서 모욕감과 수모를 느꼈다 소크라테스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갑자기 가로막고 나서서 그들을 철학적인 대화로 인도하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는 항상 불쾌하게 흘러갔다 오전 늦게 장을 보려고 아테네의 장터 아고라에 온 사람이라면 언제든 소크라테스 때문에 방해를 받을 수 있었다 뭉툭한 코에 성긴 머리카락, 큰 머리, 툭 튀어나온 이마, 거기다 언제 빨았는지 모를 지저분한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자그마한 남자가 다가와 생기있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갑자기 진리가 무엇이고 선과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대답을 하면 소크라테스는 재빨리 다음 질문을 던졌다 주로 처음의 대답 그 자체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처음보다 조금 더 오래 생각하다가 대답을 하면 또다시 상대 논거의 약점을 파고드는 신랄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이렇게 질문과 대답이 몇 차례 오가고 나면 사람들은 대부분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원한 것은 사람들을 진정한 앎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는 남들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항상 이런 식으로 물음을 던지면서 자신의 생각과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독특한 대화법에서 스승은 끊임없이 문제의 배후를 캐묻는 역할을 한다 제자에게 자신이 던진 질문을 숙고하게 하고, 제자로 하여금 생각하는 것을 말하게 함으로써 그 스스로 진정한 앎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적 방법’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진정한 인식을 얻고 거기서 비롯된 올바른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소크라테스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소크라테스가 고소당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영영 알아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시 아테네가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아테네는 온 도시를 초토화시킨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참패했다 스파르타군의 사령관 리산드로스는 30명의 과두 정치인을 내세워 아테네를 다스렸는데, 이들은 과거의 그 어떤 과두 정치인들보다 훨씬 폭압적이고 잔인했던 탓에 아테네 역사에 ‘30인 참주’의 공포 정치로 기록되었다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 시절에 도시의 지배자들과 티끌만큼도 교류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죄를 물을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이 30인 참주를 몰아내고 나자 막 새 질서를 잡아가는 아테네에서는 무엇보다 안정과 명확한 대답이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확실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는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 도시의 진부한 속성이 다시 강화된 것이다 아테네는 문학과 조각, 건축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지중해의 다른 대다수 그리스 도시들과는 달리 신들에 대한 과거의 국가적 숭배 의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라는 걸출한 철학자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철학 내에서조차 새로운 합리적 사고가 아직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소크라테스는 존경과 경이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평화의 교란자로 비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 소송은 일대 사건이었다 기원전 399년 초 소크라테스 사건은 당시 아테네의 일반적인 법에 따라 500명으로 구성된 시민 배심원단 앞에서 심리가 진행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변호했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관점을 자기 변론의 중심으로 삼았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소크라테스는 세 차례 연설을 했고, 그것은 훗날 제자 플라톤의 저서『소크라테스의 변명』 에 수록되었다 소크라테스는 핵심 본론에 해당하는 첫 연설에서 고소 내용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먼저 자기처럼 사물을 연구하는 사람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게 틀림없다는 고소인들의 논거를 거론했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그의 지혜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라는 것이 소크라테스 반대론자들의 주장이었다 이 점과 관련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어떻게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그의 친구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신전을 찾아가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신탁의 대답은 이러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롭고, 에우리피데스는 더 지혜롭다 그러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소크라테스는 신탁을 반박하기로 마음먹고, 일단 정치인과 작가, 수공업자들에게 질문을 해보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모두 실제보다 스스로를 더 똑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근거라는 것도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자신들에게 맡겨진 일을 능숙하게 잘 처리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관찰을 통해 자신이 실제로 그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결론이 나온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 플라톤의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떤 정치인과의 대화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 그 정치인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면서 뭔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다 ” 비록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의미로 변형된 이 문장에서도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반어법이 어른거린다 당연히 소크라테스도 뭔가 아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에 숨은 반어법을 끄집어내면 이런 의미가 될 것이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소송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끝나고 표결이 이루어졌다 유죄일까 무죄일까? 280 대 220표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이제 당시의 소송법에 따라 원고와 피고 양측은 각각 구형을 제안할 수 있었고, 이것은 표결에 의해 결정되었다 원고 측은 다시 한 번 사형을 주장했다 피고인 소크라테스는 어떤 형벌을 제안했을까? 그는 정녕 목숨을 구할 뜻이 있었다면 저지르지 말아야 할 실수를 저질렀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연설에서 공공 자선가인 자신에게 시 공회당에서 평생 무료로 숙식하게 해달라고 제안했다 이것이 처벌이란 말인가? 감히 사형 구형을 받은 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이던가? 한마디로 이것은 법정 기만이었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마지 못해 벌금형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미 도발적인 첫 번째 제안이 화를 초래한 뒤였다 늙은 철학자의 유머를 누구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500명의 시민 배심원단은 360대 140으로 사형에 찬성했다 처음에 유죄로 판결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수가 사형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연설을 했다 처음엔 자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제기한 성가신 질문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자기보다 더 불편하게 따지고 드는 사람들이 뒤를 이으리라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친구들에게로 말문을 돌렸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그것이 꿈도 없는 수면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말하듯 죽음이 만일 또 다른 세상에서 지난 시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라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미노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한다고 말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변론 #소크라테스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