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복음 특강]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이 십일조를 내라는 뜻이라고? I 전삼용 요셉 신부(수원교구) 2025.2.9 천주교/가톨릭/신부님강의/가톨릭스튜디오
#전삼용요셉신부 #가톨릭스튜디오 연중 제5주일 –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말이 십일조를 내라는 뜻이라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의 겸손함이 두드러집니다. 예수님께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권유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베드로는 순종합니다. 그러자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베드로는 놀라서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지상에서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를 잡는 게 행복하겠습니까, 사람을 낚는 존재가 행복하겠습니까? 행복은 자존감에 의해 결정됩니다. 종이배를 만드는 어린아이가 행복할까요, 우주 비행선을 만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할까요, 인간이 행복할까요? 짐승이 행복하다면 먹는 것만 찾는 짐승처럼 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짐승는 짐승은 낳고, 인간은 인간을 낳습니다. 개 팔자가 아무리 상팔자라지만, 강아지를 부러워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인간을 낳고 기를 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느님의 자녀를 낳는다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느끼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끝에 매번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에 에덴동산에서부터 잘 나타납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하느님 자녀를 낳으라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하십니다. ‘옥씨 부인전’에서 노비 구덕이는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양반에게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 특별히 그녀의 주인들은 더 악랄한 존재들입니다. 구덕이가 그렇게 고난을 받는 이유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탈출하여 한 주막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그 집에 옥태영이라는 외국에서 살다 온 양반이 묵게 됩니다. 그녀는 외국에서 살아서인지 양반임에도 구더기처럼 살라고 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구덕이에게 동무처럼 잘해 줍니다. 구덕이는 그동안 양반에게 당해온 것에 비해 큰 사랑을 받으며 가당치 않은 꿈을 굽니다. 옥태영의 집에서 동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적 떼가 주막에 불을 질러 옥태영이 죽습니다. 죽으면서 옥태영은 구덕이에게 꼭 꿈을 이루라고 그녀의 목숨을 구합니다.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를 손녀딸로 착각합니다. 구덕이는 옥태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잠시 옥태영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산적들에게 벌을 받게 한 이후 다시 떠나려고 합니다. 이때 옥태영의 할머니는 구덕이에게 옥태영으로 계속 살아줄 것을 권합니다. 구덕이는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옥태영으로 삽니다. 그러면서 옥태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과 같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노비들을 변호하며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옥태영이 된 구덕이의 삶이 행복할까요? 예수님은 구덕이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부르십니다. 우리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의 인권을 신권으로 들어높여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게 필요할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데면 전념하며 불쌍한 이들을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스가 그러한 예입니다. 멕베스는 마녀들이 하는 예언을 믿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다는. 그래서 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런데 불안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다 결국 자신이 미쳐버립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왕의 권위를 합당하지 않았지만, 왕 자신이 우리에게 승계한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 하셨음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선악과를 바쳐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이 선악과를 바치라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순종하면 많은 물고기가 잡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서 내가 누구이고 그분이 누구인지 압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주신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도 그분을 이기고 나에게 주신 것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도 축복을 멜키체덱 대사제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받았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과를 반드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덕이가 자신이 구덕이였음을 잊으면 옥태영으로 살아도 소용이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