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교수-한국교회 성령세례 논쟁 조용기 목사를 표적으로 하다-성령론-성령

배본철교수-한국교회 성령세례 논쟁 조용기 목사를 표적으로 하다-성령론-성령

1970-80년대에는 한국교계 내에 크게 나누어 세 가지 흐름의 성령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첫째는 개혁주의 즉 주로 장로교 계통의 성령론이고, 둘째는 웨슬리안-성결 계통의 성령론이며, 셋째는 새로 시작되어 급증하고 있는 하나님의성회 특히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한 오순절주의 성령론이었다 이 시대의 오순절주의 성령론은 방언, 신유, 예언, 투시, 통역, 능력 등의 ‘성령의 은사 받는 운동’에 강조점을 불러일으키면서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만일 순복음교회의 성장세가 미미하였더라면, 그래서 기존의 장로교와 감리교와 침례교 그리고 성결교 등의 교회들이 받는 영향도 크게 우려할 이유가 없었더라면, 과연 그 시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성령세례 논쟁이 일어났을지 의문이다 교단적으로 볼 때 성결교나 감리교의 성령론은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교리적 노선이었기 때문에 장로교에 비해 순복음교회에 대한 강도가 신학적으로 덜 민감했다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대항하여 맞선 이는 당시 정통 개혁주의신학의 대표자로서 인정받고 있던 장로교 총회신학교의 박형룡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오순절주의와 개혁주의 성령론의 교리적 차이가 교계 간행물들의 지면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영산이 1967년부터 󰡔신앙계󰡕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성령세례 신앙과 방언의 체험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고, 박형룡은 󰡔신학지남󰡕 1968년 여름호에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입장에서 “성령”에 관한 글을 게재한 것이다 영산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 자신의 성령론을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중생과 성령세례는 동일한 체험인 것이 아니다 분명한 다른 별개의 체험이다 물론 중생과 성령세례는 체험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기간을 두고 분명히 체험할 수 있는 별개의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 조용기, “성령론 (22)”, 󰡔신앙계󰡕 제3권 5호 (1969 5): 7 그러나 영산은 교계에서 빗발치는 비난에 대해 주장의 강도를 약간 낮추게 된다; “그렇다고 나는 결코 방언이 성령세례라고는 말하지 않는다(어떤 사람들이 오늘날 하나님의성회에서는 그렇게만 가르친다고 잘못 전하고 있는 것처럼) ” 조용기, “성령론 (25)”, 󰡔신앙계󰡕 제 3권 8호 (1969 8): 8 영산은 그동안 확고하게 가르치고 또 전하고 있던 방언과 성령세례를 연결시키는 메시지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물론 방언 자체가 성령 충만은 아니다 그러나 방언은 성서적으로 확증된 성령 충만한 체험의 강력한 외적 표적인 것이다 ” 조용기, “성령론 (27)”, 󰡔신앙계󰡕 제 3권 10호 (1969 10): 15 영산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가장 명확한 외적 표적이라고 하는 주장을 사도행전의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이에 대해 자신의 말로 확고하게 대답하는 표현을 피해가는 듯 보인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방언에 대한 교계의 비판이 더욱 거세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자 󰡔신앙계󰡕 창간 이후 그동안 집중적으로 게재되던 신자들의 성령세례와 방언 간증문들이 1970년대부터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것은 필경 신자들의 성령세례 체험 간증이 너무 주관적 체험 중심으로 기술되어, 교계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을 여지를 많이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제는 공격 받기 쉬운 신자들의 성령세례 간증문 대신 순복음신학교 박정근 교수의 “방언의 유익이 무엇인가?” 박정근, “방언의 유익이 무엇인가?”, 󰡔신앙계󰡕 제36호 (1970 3): 32-34 라는 오순절주의 성령론에 입각한 방언론 연재가 여러 차례에 걸쳐 게재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영산은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좀 더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신학화, 체계화 하려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 하나의 노력은, 오순절주의 성령론이 복음주의적 신앙고백의 큰 틀에서 볼 때 어긋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으려 한 점이다 눈에 띄는 한 예로, “미 연합장로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서적임을 인정하다 ” “미 연합장로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성서적임을 인정하다 ”, 󰡔신앙계󰡕 제47호 (1971 2): 68-70 라는 보고서를 인용한 점이다 영산은 󰡔신앙계󰡕의 지면을 통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신자들의 개인적 경험으로서 인정되며, 또 이 체험을 한 신자들은 사랑의 은사 가운데서 이러한 체험을 균형 있게 유지하라는 지침을 소개하였다 이것은 1970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연합장로교 총회의 보고서 내용인데, 때마침 미국 내에서 일고 있던 은사갱신운동 또는 신오순절운동의 확산에 대해서 전통적 교단 교리와의 적절한 용인의 차원에서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까다로운 보고서의 내용을 일반 신자들도 구독하고 있는 󰡔신앙계󰡕에 여러 지면에 걸쳐 소개하였다는 점은, 영산이 오순절주의 성령론이 복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반영해 준다 이 시대의 영산이 지닌 가장 강력한 오순절주의 성령론의 표명은 1971년에 출간된 󰡔성령론󰡕이다 조용기, 󰡔성령론󰡕 (서울: 영산출판사, 1971) 그 이전에도 오순절주의 성령론에 대한 번역서나 저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성회 교단 내에서만 고백되어지는 범위의 한계가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영산의 󰡔성령론󰡕은 초교파적으로 매우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며 판매되어 갔다 당시의 대부분 성령론 번역 서적들은 오순절주의나 은사갱신운동 계통의 외국 목회자와 부흥사들의 저술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영산의 󰡔성령론󰡕은 성령세례를 사모하고 또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한국인 독자들에게 오순절주의 성령론 신앙으로 이끄는 힘 있는 안내서 역할을 해 주었다 당시에는 성령운동의 여러 조류들, 이를테면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과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 그리고 전통 오순절주의와 은사갱신운동 그리고 웨슬리안 성결론 등의 차이점에 대한 인식이 신학자들 사이에도 아직 선명하지 않았다 서점가에는 여러 종류의 영성서적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어떤 책이 어떤 성령론 노선에 속한 것인지 거의 분별하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영산은 독자들에게 오순절주의 성령론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드러내기를 원했고, 이런 목적으로 읽기 쉽게 출간된 󰡔성령론󰡕은 오순절교파에 속한 사람은 물론 기타 교단에 있는 이들에게도 널리 읽혀지는 책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격적으로 박형룡의 성령세례 관념이 󰡔신학지남󰡕에 등장하게 된 것은 1971년 가을호와 겨울호에 “성령의 세례와 충만” 박형룡, “성령의 세례와 충만”, 󰡔신학지남󰡕, Vol 38(4) (1971 12), 6-13 이라는 글을 연재한 것이다 그는 Charles Hodge나 B B Warfield 등이 말한 성령 은사의 중단성(中斷性)과 중생과 연관하여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강조하면서 곧 바로 성령세례에 대한 논의로 들어갔다 박형룡은 성령의 세례를 정화성과 최초성과 그리고 보편성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고 보았다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서울: 은성문화사, 1972), Vol 5, 51-54 이러한 노선은 영산의 성령세례 관념하고는 전적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박형룡의 신학 작업은 단지 성령론 분야에만 속한 것은 아니고, 개신교 신학 전반에 걸쳐서 정통 개혁주의신학의 잣대를 가지고 한국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았다고 본다 그 중에 한국교회의 전통적 성령 신앙은 그가 지닌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견지에서 볼 때 당연히 수정을 가할 대상이었다 그러자 마침내 오순절주의 성령론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진 것이고, 그가 이런 작업을 펼치기 위해 선택한 궁극적 표적은 오순절주의의 대표자 격인 조용기 목사였던 것이다 이에 맞서 영산이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변호하기 위해 또 한 차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어떤 교리적 체계보다도 더 중시하는 입장의 학자들로부터 오순절주의 성령론에 대한 설득력을 얻으려 했다는 점이다 󰡔신앙계󰡕에서는 특집으로 ‘오순절 신앙’을 다루고, 문상희, 조향록 등을 초청하여 “오순절 이후” “오순절 이후” 대담 프로그램, 󰡔신앙계󰡕 (1972 5): 15-21 라는 대담 프로그램을 가졌다 그리고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홍현설의 “성령은 증거하신다 ” 홍현설, “성령은 증거하신다 ”, 󰡔신앙계󰡕 (1972 5): 22-25 는 글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특집 ‘오순절 신앙’에서는 문상희의 “오순절 성령 강림과 기독교 신앙” 문상희, “오순절 성령 강림과 기독교 신앙”, 󰡔신앙계󰡕 (1974 5): 18-21 을 게재하였다 위의 대담자 그리고 게재자 명단을 보면 그 특징이 개혁주의신학이나 보수주의적 신학을 따르는 신학자들보다는 다소 진보주의적 신학자 또는 종교학자들을 초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오순절주의 성령론의 체험주의적 신앙에 대한 긍정적인 학계의 답변을 유도하려 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을 따르는 신학자들에게서는 오순절적 성령 체험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의 여지를 기대하기 힘들지만, 진보주의 신학자들이나 종교사회학자들은 인간의 종교 체험을 교리적 차원을 넘어서서 일단 인간의 실존적 경험으로 인정하며 존중하는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산에게는 당시에 신학적으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에 맞서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방어하고 변호할만한 실력을 갖춘 신학자가 주위에 아직 없었다 그런데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을 따르는 차영배와 안영복 등이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대신하여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에 맞서 공방을 하다가 희생을 치룬 격이 되었다 그동안 영산은 다만 묵묵히 교회 성장만을 위해서 주력할 뿐, 신학계로부터는 모진 뭇매를 감수할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