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사마천대학 : 『사기』 전문가 과정(제57강 '진시황 4-4')

유튜브 사마천대학 : 『사기』 전문가 과정(제57강 '진시황 4-4')

진시황 마지막 강의입니다 관련하여 진시황릉에 대한 소개의 글을 공유합니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릉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시황 영정(嬴政)의 무덤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 능원(陵園)으로, 섬서성 임동 동쪽 5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진시황은 13세에 아버지 장양왕(莊襄王)을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른 다음, 22세 때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친아버지로 추정되는 여불위(呂不韋)를 몰아내고 노애(嫪毐)의 반란을 평정하여 실권을 손에 넣었다 그 후 16년 동안 6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천하를 통일했다 통일 후 왕호를 황제로 고치고 스스로 시황제라 불렀다 이와 함께 짐, 폐하, 조(詔) 등과 같은 관련 용어들을 정리하여 황제권 확립을 위한 기초를 마련했다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군현제를 시행하고, 문자․도량형․화폐를 통일시켰다 또 법전을 완비했다 대외적으로는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여 흉노를 방비했고, 아방궁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여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그런가하면 일반 백성들이 정치적인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분서갱유라는 사상초유의 언론 탄압정책을 실행하여 원성이 높았다 기원전 210년 지방을 순시하던 도중 사구(沙丘)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진시황에서 시작된 능원제도는 그 뒤 역대 황제들의 능원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62년 섬서성 문물관리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했으며, 74년 고고학 관련 단체와 함께 전면적인 조사를 벌였다 능원의 평면은 남북이 긴 장방형이고, 안팎으로 흙을 다져 쌓은 2중의 담장이 있다 안쪽 담장은 남북 1,300 동서 578m이며, 바깥쪽은 남북 2,513 동서 974m다 무덤의 분구(墳丘)는 안쪽 담장 남반부에 있는데, 역시 흙을 다져 올렸다 모양은 바닥은 방형이고 각 변의 길이는 대략 350m에 높이는 현재 43m다 분구의 원래 모습은 오랜 세월을 고치면서 무너져내려 이미 제 모습이 아니지만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바가지를 엎어놓은 모양이었을 것이다 분구의 동․서․북 세 변에서 무덤 길이 발견되었다 서쪽 길 쪽에서 동으로 만들어 색을 칠한 수레가 두 량 발견되었는데, 각각 네 필의 동으로 된 말이 끌고 흙으로 구운 한 명의 마부가 타고 있는 모습이다 실제 크기를 거의 정확하게 반으로 줄인 크기다 화려한 장식과 각종 마구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 진나라 궁정의 수레형식과 말을 매는 방법 등을 연구하는데 좋은 실물자료가 되고 있다 안쪽 담장 북반부에서는 규모가 굉장한 건축유지들이 발견되었는데, 진시황의 침전(寢殿) 자리가 아닌가 한다 역시 안쪽 담장 동․서․남 3면 담장 밖에서는 담을 따라 세운 복도식 건축유지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항아리에 ‘여산원(麗山園)’, ‘여산식관(麗山食官)’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여산원의 좌우 식관들이 거처하던 곳일 것이다 능원의 동쪽은 시황의 아들 딸들의 순장 무덤으로 보인다 도용(陶俑)과 말을 산채로 묻은 구덩이들이 있고, 군진(軍陣)을 모방한 병마용갱도 있다 능원의 서쪽은 노역자들을 묻은 묘지로 추정되는데, 돌과 구운 벽돌, 기와, 건축자재 등이 쌓인 장소도 확인되었다 특히,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릉 지하궁전에 수은을 흘려 강과 바다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늘 수은 성분의 존재여부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에 1981년 12월 중국과학원 지질부 상용(常勇), 이동(李同)이 처음으로 지구화학 수은측량법을 이용하여 진시황릉 지하궁전의 수은 존재여부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샘플 채취와 측정시험을 실시했다 1982년 5월, 상용, 이동은 다시 진시황릉과 어지촌(漁池村)에 와서 각각 토양샘플을 채취해서 화학실험을 거친 결과 진시황릉 봉토 내에 다량의 수은 성분을 포함한 물질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로써 초보적이지만 [사기]의 기록대로 지하궁전 내에 수은이 존재할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유튜브_사마천대학 #진시황 #진시황릉 #사마천_사기 #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