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목포문학관] 우리나라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 By 문학관TV

[전남 목포문학관] 우리나라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 By 문학관TV

[전남 목포문학관_우리나라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 By 문학관TV] 우리나라 연극에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은 1897년 개화사상가이자 무안감리를 지낸 김성규의 장남으로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성규가 목포항의 무안감리로 임명되자 11세에 목포로 이주해 살게 됩니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재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구마모또 농업학교와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정오」, 「이영녀」, 「두데기 시인의 환멸」, 「난파」, 「산돼지」등이 있습니다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水山)입니다 대학 시절부터 연극 활동을 하였고, 1920년 유학생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조직한 후, 1921년에는 동우회 순회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 순회공연을 다녔습니다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근대극을 연구하고 실현한 선각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김우진은 29살의 짧은 생애에 시(50편), 희곡(5편), 소설(3편), 평론(20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조금만 더 활동했다면 훨씬 많은 작품을 남겼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활동 시기로 볼 때 목포가 배출한 최초의 근대예술인이기도 합니다 이전의 극들을 신파극이라고 한다면, 김우진 이후에야 비로소 신극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 김우진은 천재라고 했는데요 16세 때 「공상문학」(미발표) 이라는 소설을 창작하고, 또 18세 때 일문시 「아아 무엇을 얻어야 하나」라는 근대 자유시를 창작합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목포로 돌아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회사 일을 돕습니다 현재 천주교 북교동 성당은 김우진이 어렸을 때 살았던 ‘성취원’이라는 곳입니다 그가 살던 성취원은 방대한 대지주의 대저택으로 유명했는데요 99칸 집이라고도 했고, 장성에서 왔다고 해서 김장성댁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아버지 회사 일을 돕고, 밤에는 ‘성취원’ 2층에 ‘백수재’라는 서재를 만들어 창작에 몰두합니다 현재는 천주교 성당이 자리하고 있어 건물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김우진을 기리기 위한 ‘극작가 김우진 문학의 산실’이라는 작은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이영녀」 등이 쓰입니다 「이영녀」는 일제 강점기 목포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데요 작품 속 대화에 당시 쓰던 전라도 사투리가 잘 나타나 있고, 유달산 아래 기거하던 빈민들의 처참한 삶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Scene 1 유달산 정상의 바위가 배경으로 보이는 안숙네 집, 뚜쟁이인 안숙의 집에 13살 명순과 10살 관구, 5살배기 딸 숙희와 함께 이영녀가 세 들어 살고 있다 밖으로 나돌며 가정을 돌보지 않는 남편 대신 생계를 떠안은 영녀는 삯바느질만으로 생계와 교육을 충당할 수 없어 안숙의 알선으로 매음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영녀는 비인간적인 집단매음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녀 : 암만 이런 짓을 하고 지낸다 해도 오늘 저녁 같은 짓은 죽으면 죽었지 다시 안 당할라오 (더러워 못 견디는 듯이 침을 택 뱉는다) 안숙 : 어쨌다고 이 야단인가 영녀 : 인재 당초에 그런 자식들하고는 얘기도 내놓지 마시오 (한참 있다가) 아 그노무 자식 저는 건너방에 얹어서 뭇놈들을 번을 세 가면서 들여보내니 당초에 사람이 당할 짓이요? 이것이 안숙 : 그렇지만 이것 보소 사람이란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네 내 젊을 때 얘기 안 들었는가 이왕 당하는 것 아닌가 눈 한 번만 찔끈- 영녀 : (지금까지 능청거리는 버들과 같은 그이는 홀연히 무슨 신이 붙은 듯이 화를 벌떡 내며) 그놈하고 단짝이 돼 가지고 나 못 할 짓만 시키면 뭣이 좋겠소 이 짓도 이 짓인데, 에이 참 - 「이영녀」, 연극 대본 한 부분 죽기 직전인 1926년에 집필한 「난파」와 「산돼지」는 한국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이며, 당대 신파극을 극복하는 전위적 실험극이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외에 평론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요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라는 논문을 통해, 당시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했고요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 사전의 정비, 동요의 수집 등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1920년대 발표한 희곡은 한글로 쓴 최초의 근대극에 해당합니다 그 때문에 김우진에게는 최초의 근대극작가라는 칭호가 따라다닙니다 더불어 최초로 신극 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만, 윤심덕과의 투신자살로 인해 ‘현해탄 정사의 주인공’이라는 비운의 꼬리표가 항상 붙어 다닙니다 김우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이 풍부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정·사회·애정 문제로 번민하다가 1926년 8월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귀국 선상에서 대한해협(현해탄)에 투신 정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보다는 이미 작품이나 일기 속에 예고된 죽음이 흔적들이 드러납니다 또, 김우진은 평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요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라는 논문을 통해서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 사전(辭典)의 정비, 동요의 수집 등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김우진은 시 50여 편을 쓴 시인이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문학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세계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현해탄 정사의 주인공’이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붙어 다녔기 때문입니다 김우진과 윤심덕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김우진의 문학적 성과와 업적에 관심을 더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의 묘는 무안군 청계면 월선리 몰뫼산 '문학사 김우진지묘' 상석과 함께 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당시 시신을 찾지는 못했기 때문에 묘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지는 않고, 원혼을 끌어온 초혼(招魂)묘입니다 김우진의 아들인 김방한(전 서울대 명예교수)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할아버지 김성규와 아버지의 유품을 목포시에 기증했습니다 총141점(김성규 초상화 3점 제외)인 유품 속에는 김우진의 육필 원고를 비롯해 사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 [ 사단법인 한국문학관협회 ] 공식 홈페이지 : 공식 블로그 : 87개 문학관이 가입되어 있는 사단법인 한국문학관협회는 문학관 운영 활성화 및 지역 주민의 문학 향수 기회를 넓히고, 프로그램 상호 공유를 통한 우수 문학 프로그램 개발, 문학관 운영 인력 양성, 문학관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 및 홈페이지 개설을 통한 전국 문학관 홍보 및 협력 네트워크 운영을 목적으로 지난 2004년 04월 설립 되었습니다 현재는 법인화를 통해 국민과 회원문학관을 위한 공익적 사업을 확대하고 한국문학의 진흥과 문학 유산의 보존 ,전시 ,교육, 홍보를 지원하는 단체로 성장 있으며 나아가 지역민과 일반시민 청소년의 정서함양에 도움이 되는 지역문학관을 지원하는 비영리 사단법인 입니다 [ 협회사업 ] 1 문학관운영을 위한 지원사업 - 회원문학관의 홈페이지 운영 및 보완을 위한 지원 사업 - 전시 자료, 문인유물전시, 보존 시설, 수장고 확충을 위한 지원 사업 - 지역문학관 특성화 프로그램 지원 사업 주관 (2018~) - 문학관 상주작가 지원 사업 주관 (2019~) 2 지역주민의 문학 향수 기회 확대 - 사단법인 한국문학관협회 주관의 행사기획 - 각 문학관 별 프로그램 지원사업 시행 3 우수프로그램 상호교류 - 국내 문학관 탐방 사업 실시 - 해외 선진 문학관 및 문학 시설 관련 연수 사업 실시 4 문학관 운영 인력 양성을 위한 워크숍 개최 - 문학관 실무자를 위한 사업설명회 및 워크숍 개최 (연 2회 이상) - 문학관 업무 실무자 운영 능력 향상을 위한 위탁교육 5 문학관 소개 자료 및 홍보물 제작 - 회원 문학관 홍보를 위한 홍보책자 및 자료집 발간 - 문학관 TV를 통한 SNS홍보 강화 및 정보 공유전달 6 문학관 건립을 위한 지원 사업 - 설립 준비 및 과정 자문 및 관계 당국 담당자 공유 - 설립 후 운영 활성화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