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6편   [ 타지 마할 ] 세계 7대 불가사의

인도 여행 6편 [ 타지 마할 ] 세계 7대 불가사의

타지 마할 Taj mahal 인도의 상징이자, 인도 여행의 하이라이트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 중세 이후 선정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이면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신 세계 7대 불가사의는 페루의 잉카 유적지 맞추픽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 멕시코 치첸이트사의 마야 유적지, 중국 만리장성 인도 타지마할,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 이탈리아 로마 콜로세움 등이다 높이가 75미터, 돔 부분의 무게만 1만 3000톤 이상 나가는 타지마할 남녀 간의 깊은 애정은 때로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한 남자의 순애보가 담긴 건축물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최고의 건축물이다 우려 22년동안 2만명을 동원하여 만들어졌다 유럽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에서 전문가를 불러오기도 했다 건물의 양식은 무굴제국 2대왕이었던 후마윤의 묘를 본따서 만들었다 완벽한 대칭, 홍수 대비, 네 개의 미나렛((minaret첨탑)은 지진 대비 탑이 밖으로 약간 휘어있게 건축했다‘ 첨탑은 바깥쪽으로 약간 휘어지게 세워졌는데, 이는 안구의 굴곡을 고려해 첨탑을 직선으로 보이게 하고, 지진으로 첨탑이 무너져도 묘궁을 파괴하지 않도록 한다 속이 텅빈 거대한 돔, 오직 대리석으로만 건축되었다 현대 기술로도 만들기 어렵다는 거대한 대리석 무덤, 그래서 7대 불가사의이다 타지마할 건설 당시 무굴 제국은 보석과 면직물, 향료 수출을 통해 세계의 부를 쓸어 담고 있었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샤 자한(Shah Jahan) 황제는 타지마할을 완성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유명한 건축가들을 초청했으며, 22년 동안 매일 2만 명의 인부들과 코끼리 1,000마리를 동원했다 또한 국고가 바닥날 때까지 세계 각국의 귀한 보석과 재료를 사들였다 건축의 균형과 세련미를 위해 본관의 한쪽 옆에 모스크를 만들고는 그 반대쪽에는 모스크와 외형이 똑 같은 건물을 세운 그 치밀함도 돋보인다 무굴의 5대 황제 사자한(Shah Jahan)이 병이 걸리자 여러 아들들이 황제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인다 본인도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아버지도 그랬었다 사자한은 첫째 왕자에게 황제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3째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zeb)가 황제가 되어서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아버지 사자한을 아그라성에 가두고 만다 8년동안 아그라성에 갖힌 그는 그곳에서 타지마할을 보며 쓸쓸히 인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75세 샤 자한 황제에게는 5000명의 후궁과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은 뭄타즈 마할(Mumtaz mahal)) 뿐이었습니다 사실 샤 자한의 정치상의 적인 계모 '누르 자한'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결혼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애틋한 사랑을 지킨 끝에 결국 결혼에 성공합니다 이후 그들은 17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뭄타즈 마할로 불렸던 왕비 '바누 베굼'은 자식을 14명이나 낳았고, 심지어 전쟁터에도 함께 다닐 만큼 샤 자한과 애정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뭄타즈 마할은 아기를 낳다가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샤 자한 왕의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겠다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며칠 새 백발로 변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실제로 샤 자한 황제는 2년간이나 상주가 되어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인도를 점령한 영국은 타지마할의 거대한 돔을 장식하고 있던 황금을 모두 떼어내고 그 자리를 구리로 덮었으며, 은으로 만든 문은 청동으로 바꿔치기했다 샤자한이 뭄타즈 옆에 묻히니 완벽한 대칭을 잃게되다 특히 타지마할 장식은 모자이크의 일종인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또는 콤메소 디 피에트레 두레’ 기법을 사용해 아름다움을 더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피렌체의 건축물에서도 볼 수 있는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은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후 그 홈에 각각 다른 색의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은 것을 말한다 여러 나라에서 수입된 색색의 돌들이 순백의 대리석과 어우러져 오묘한 빛을 발하며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이 기법으로 주로 꽃을 표현했는데 이는 이슬람에서 동물이나 신상의 조각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붉은색 사암과 대리석으로 건축한 30미터 높이의 출입문을 지나면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측의 정원 · 연못 · 나무 등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 대칭구조와 건물에 적용한 기하학적 계산의 완벽함은 지금의 건축학자들이 보아도 감탄할 만하다 이 모든 것은 아주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무굴제국에서는 건축물을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백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본당 건물은 지면에서 6~7미터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단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96미터인 정사각형이다 영묘 건물 자체의 크기는 56 7미터의 정사각형이고 바닥 면에서 돔의 정점까지는 57미터에 달한다 이중의 돔(양파껍질처럼 안쪽 덮개 위에 바깥 덮개가 있는 돔)은 페르시아 양식 그대로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벽돌에 흰 대리석을 씌운 것이다 벽돌은 당시 널리 사용하던 표준 크기인 19×12 5×3센티미터의 것을 사용했다 벽돌을 주로 긴 쪽으로 쌓았지만 석회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른 다음 짧은 쪽으로 쌓기도 했다 둥근 천장은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르고 동심원의 고리들을 만들어 쌓았다 이 건축기법을 통해 내부에 강화벽을 세우지 않고도 반구형의 내부 돔과 공 모양의 외부 돔을 지지할 수 있었다 외부 돔 위에는 9미터 높이의 작은 청동 뾰족탑을 얹었고 돔 전체에는 금박을 입혔다 돔은 이스탄불 출신의 이스마일 에펜디(Ismail Effendi) 작품으로 추정한다 타지마할 건축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단을 쌓을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타지마할의 건설 부지가 강둑의 부드러운 모래 지반이기 때문에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토대를 다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에 건축기술자들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와 쇠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건축법은 20세기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밝혀졌다 근래 외벽 문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이 부활할 것이다 ” 무굴제국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할 때 건설된 타지마할은 끊임없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은으로 만든 출입문은 녹여지고 대신 구리 문이 세워졌으며 수많은 귀금속들이 약탈되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인들은 돔의 금박을 떼어내고 구리로 대체했다 인도 독립 후 지속적인 복원사업으로 타지마할은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았지만 아그라에 산재한 200여 개의 주물 공장에서 뿜어내는 독가스 때문에 흰 대리석 기념비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특히 타지마할 주변 자연환경의 변화가 타지마할을 심각하게 기울게 만들어 자칫하면 붕괴될 수도 있다 완벽한 대칭의 타지마할로 입장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