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시] 2025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선일보 이수빈의 아름다운 눈사람, 농민신문 양점순의 모란 경전, 세계일보 최경민의 예의](https://poortechguy.com/image/QG1oJceMDHk.webp)
[당선시] 2025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선일보 이수빈의 아름다운 눈사람, 농민신문 양점순의 모란 경전, 세계일보 최경민의 예의
아름다운 눈사람 / 이수빈 2025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당선작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 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 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고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눈덩이가 내 품속에 있어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같고 서툴지 않은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데 하고 있던 목도리를 푼다 모자를 벗는다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내 눈사람은 너무 잘 챙겨입어서 더 이상 눈사람 같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없다 밟히고 파헤쳐져 더 이상 하얗지 않은 운동장을 본다 선생님 제 눈사람이 가장 새하얗고 둥글어요 그리고 또 커요 나는 말하고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눈사람을 바라보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다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이 울상이 된다 이 순간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모란 경전 / 양 점 순 농민신문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예의 / 최경민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옆자리가 그랬다 살아있으면 유기동물 구조협회구요 죽어있으면 청소업체예요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나가면 누울 자리를 뺏긴다는 걸 그래도 가야 한다 새벽에 하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고양이는 새벽에 일어난 우리들보다 조금 더 불쌍하다 그래도 다 보고 올까요 죽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관할구역 끝까지 갔다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게 기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