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님의 모든것! '弼學 개론'(36) 조용필 제 3집 '황성 옛터'](https://poortechguy.com/image/xc4LDdOTdgs.webp)
조용필님의 모든것! '弼學 개론'(36) 조용필 제 3집 '황성 옛터'
(이 곳에 올린 글은 오빠에 관한 종합적 인 자료들을 바탕으로 구성 되었으며 나 의 의견을 덛붙여 작성된 글이므로 100 프로의 정확성은 장담 할수 없지만 개인 적인 의견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정확하게 쓸려고 최선을 다하였다고 말하는 바이다 ..) A면No6:'황성옛터' 왕평 작사, 전수린 작 곡, (원가수:이애리수) 장르는 4분의 3박 자 왈츠곡으로 1928년 일제 잠정기 시절, 나라 잃은 서러움을 그대로 표현한, 우리 나라 사람이 만들고 부른 최초의 대중가 요이자 최초의 민족가요이고 최초의 금지 가요가 된 곡이기도 하다.1981년 재편곡, (오빠께서 직접 편곡하셨는지는 확실치 않다.하지만 기존의 곡들 음반 재수록시 거의 편곡을 하셨으니 이곡도 그렇지 않 았을까 싶지만...우리의 아픈 역사속에 영 원히 살아있는 의미가 큰 곡이므로 곡 자 체의 멜로디와 편곡보다는 오히려 이런 배경을 짚고 감상하는 것을 권한다.) 재해석으로 이 3집에 수록되어 많은 이들 에게 잊혀져간 옛시절의 서러움과 아픔을 다시 상기시키고 감동을 주어 제2의 대중 화로 다시금 국민가요 반열에 오른 곡이 라 할수 있겠다. 그럼 먼저 일제시절 일본 검열관도 감탄 해 '조선의 세레나데'라 일컫던 '황성옛터' 원제(황성의 적)의 탄생과 이곡에 엮인 사 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가자. 1927년. 개성 만월대. (황진이가 세월의 무상함을 읊은 시로 유명한 곳) 전국순회 공연단 배우겸 극작가 왕평님과 막간의 연주자였던 바이올린니스트 전수린님이 공연차 고향인 개성을 들렀다. 주인을 잃 은채 황폐해있는 황성을 거닐면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의 한서린 달빛을 보며 고 려의 패망, 조선조의 몰락, 그리고 나라마 저 빼았긴 망국한에 눈시울을 적시다 전 수린님이 즉흥적으로 만든 가락에다 왕평 님이 가사를 붙인 느린 3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 곡이다. 그해 가을..신파극단 취성좌의 서 울 단성사 공연에서 여배우 이애리수님이 막간 무대에 등장하여 이 노래를 불렀는 데 이애리수님은 망국의 설움을 담아 부 르다가 솟구치는 오열을 참지못해 결국 노래를 중단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묘 사한 글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ㅡ객석 여기저기가 흐느꼈다. 나라 잃은 설움이 복받치고, 다시 부르라는 아우성 에도 노래하던 애리수도 3절을 끝내 부르 지 못했다. (*이곡의 가사는 원래 3절까지 이다.)ㅡ 이렇게 막간무대를 통하여 유행 되기 시작한 노래가 1932년 일본 RCA 빅터 레코드사에서 한국최초의 가요레코 드로 제작되었는데 그 당시 라벨에 인쇄 되었던 곡명은 '황성의 적' 이었다. 이음반 은 발매후 한달만에 오만장이 팔렸다고 하니 그 시대로선 어마어마한 인기였던 것이다.그 인기에 긴장한 일본경찰 당국 에서는 결국 발매 금지시키게 된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려 졌고 이애리수님은 여배우에서 가수로 환 영받는 스타가 되어 전수린님의 곡을 계 속 취입하게 되셨다. (이 원곡의 가수,작 곡가,작사가들의 개인사들이 이곡의 배경 만큼이나 너무 슬픈탓에 도저히 그냥 지 나칠수 없다. 덕분에 글 내용이 좀 길어 지 겠지만 한국의 역사? 가요사?를 공부해보 는 느낌으로 둘러보고 가야겠다.) 11년전인 08년,포털사이트에 '일제 강점 기 시절에 애달픈 노래로 민중들의 가슴 을 달랬던 '황성옛터'의 원가수 이애리수 님이 살아있다.'는 소식으로 화제를 모은 적이 있었는데 포털에서 이처럼 이애리수 님이 주목 받았던 이유는 남편과의 뜨거 운 사랑때문에 80년간 대중앞에서 모습 을 감추었다는 드라마틱한 사연때문이었 다.가수와 팬으로 만나 사랑에 빠진 두사 람,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던 남편 (배동 필님은 부모가 맺어준 여인이 있었고 이 애리수님도 그녀의 팬이었던 이광재란 남 편과 세살짜리 아이가 있었다.)과 사랑을 하게된 이애리수님은 유부남과 유부녀였 고 대학생과 가수라는 신분때문에 사회의 질타와 집안의 극심한 반대라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죄값?을 치뤄야만 했다. 그 로 인해 두번의 자살시도 (한번은 동반자 살) 이후에서야 대중 앞에 서지 않는 조건 으로 결혼을 할수 있게 되었다. (그분의 아들조차도 어머니가 '황성 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대학다닐때 처음 알았다고 할 정도로 숨어? 사셨다 한다.) 11년전 9 9세...백수를 바라보는 연세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안타깝게 도 그 다음해인 09년에 돌아가셨다. (분량상 실제 이야기를 그대로 옮길수 없 음이 안타까울 정도로 너무 애틋한 사랑 이야기 이더라.) 가수는 자기가 부른 노래 를 닮는다?는 속설이 있다는데, 18세라는 어린나이에 이곡을 불러서일까..그 분의 삶이 노랫말을 닮아버린것 같아 안쓰럽다 . 그리고 작곡가 전수린(본명:수남)님은 어려서부터 개성 호수돈여학교 교장이었 던 선교사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12살 때 부터는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송도 고 등보통학교 3학년때 서울로 상경,작곡가 홍난파님께서 운영했던 음악학원 ‘연악 회’에 들어가 바이올린과 작곡을 배웠다. 19 25년에는 한국 최초로 코리안 재즈 밴 드를 만들었고1927년 라디오 음악 프로 그램의 반주를 맡기도 했다. '황성옛터'를 작곡한 이후 50여년 동안 2천여곡의 가 요를 작곡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생활이 어려워 임종직전까지도 동네 어린 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며 근근히 생 활을 유지하시다 78세에 세상을 떠나셨 다.(하긴 저작권이라는 말조차 없었을 시 절이였으니...) 그리고 마지막 분, 이곡의 작사가 이신 왕 평(본명 이응호)님은 1940년 악극단을 이끌고 순회공연을 하던중 평북 강계에서 배탈이 난 주연배우의 대역으로 열정적 연기를 펼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33 세의 젊은 나이에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 신, 비운의 대중연예인으로 기록 되었다. 근데 그때 나쁜 일본×들이 죽은이의 장례 도 못치르게 매장허가를 내주지 않아 왕 평님 부친께서 아들의 유골을 개울물에 띄워 보냈다고 거짓으로 일본×들을 따돌 리고 밤에 몰래 산기슭에 가매장 하였다 는 슬픈 실화도 있다. 워낙 애닳픈 요절이 라 41년 2월 오케레코드사에서 '오호라 왕평' (조명암 작사,김해송 작곡, 남인수 노래)이라는 추모가요곡이 음반으로 발매 되기도 하였다..... 일본 군복을 입어야 했던 고종황제의 손 자 '이후'도 (후엔 박정희 대통령도 이곡을 엄청 애청했단다.) 술에 취하면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하고, 그때 그 시절 너나할것 없 이 따라 부르는 바람에 방방곡곡이 황성 옛터로 변해버렸다는 슬픈이야기... '황성옛터'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면...(👎)더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http://naver.me/FlWrxCjD 이곡에 엮인 슬픈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 리 하고 이제부턴 이곡과 울오빠의 이야 기를 해보자.(고복수, 신카나리아, 남인수, 최병호,원방현,김용만,손시향,오기택,이미자,남상규,김희갑,은방울자매,박일남,최숙자,최정자,정원,배호,윤복희,나훈아,남진,패티김,문주란,봉봉사중찬단,이수미,조영남,최헌,김태곤,김정호,한영애,신중현,이생강,김연자,김용임,주현미,윤시내등등..너무 많아 도저히 다 못적겠다.ㅎ 과장을 좀 보태면 아마도 우리나라 가수 반정도 쯤? 되지 않나 싶다.) 이 많은 분들이 누구 냐구요? 이분들은 모두 이곡 '황성 옛터' 를 리메이크 내지는 평소에 무대에서 즐 겨 부르신 분들이란다. 3집에서 이곡을 처음 들었을때 난 당연히 울오빠의 신곡? 인줄 알았었다. 이렇게나 슬픈 사연을 가 진, 이렇게나 오래된 노래인줄 꿈에도 몰 랐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별반 다 르지 않았다.다른 이들이 부른 이곡을 들 어 본적도 들어볼 기회도 없었기에 내겐 오직 울오빠의 '황성옛터'일 뿐이다.(이 글 을 올리기전까지 다른분들의 노래를 들어 보고 마무리할 예정이다. 들어보나 마나 겠지만 사실 그 중에서도 울오빠의 목소 리가 담긴 이곡이 망국의 한을 제대로 살 려 주어서 가장 듣기 좋다는 평들이 대부 분이기도 하구..ㅎ)가슴을 사무 치게 하는 절규의 창법으로 듣는 이들의 소름을 돋 게 만드신 울오빠의 '황성옛터'... 바이올 린 연주자가 만든 곡이니 당연 바이올린 연주곡이었겠지? 옥구슬 구르듯이 아름 다운 피아노 연주로 시작되는 전주부터 곡이 끝날때까지 거슬림이 없는 잔잔한 사운드는 울오빠 또 하나의 주특기(또박 또박, 울오빠의 확실한 가사 전달력은 울 나라 가수중 1등이라는 평가가 있다.)와 어우러져 폐허가 된 황성옛터가 눈에 보 이는 듯한 착각까지 든다. 아직 들어보지 는 못했지만 아마도 이곡을 부르신 대부 분의 가수들이 한국인들의 대중적 음악인 트로트풍으로 부르신것 같은데 원곡도 왈 츠풍의 트롯곡이기도 하지만 울오빠의 이 곡은 다르다. 마치 짧은 한곡의 세미클래 식을 듣는듯 하다. (특히 93년 세종문화 회관콘서트 '신의소리'에서의 이곡은-일절 뿐이 긴 했지만- 연주기법과 분위기가 더 가곡스럽더라.)그러고 보면 이곡을 만드신 분이 바이올린 연주자이셨으니 원 래부터 클래식스럽지 않았을까? 레코드 로 취입되면서 대중적인 트로트쪽으로 바 뀐것이 아닐까? 바이올린 연주만으로 부 른 이곡은 과연 어떠했을까? 유튭으로 검 색하면 진짜 가곡으로 부른 영상이 나온 다. (이곡 부르신 테너 '조영갑'님 울오빠 랑 이름도 비슷해서 더 기억함ㅋ)오리지 널 가곡 버전도 아주 좋더라.. 여기서 갑자기 나의 엉뚱한 궁금증이 또 발동한다. 이곡을 구태여 이 3집에 수록 한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이유가 있을거 란 생각이 들지만 알수가 없다. 울오빠께 서 부르시기 전 이곡을 리메이크한 가수 들은 그시대에선 최고의 가수들이었다. 내가 아 는 이름의 가수들만 봐도 내노라 하 는 분들이신데 왜 울오빠까지 이곡 을 부르신걸까? 울오빠의 뜻이었을까? 그렇 다면 어떤 계기가, 이유가 있었을것 같은 데 그것은 무엇일까? 반대로 오빠의 의도 가 아니라면 분명 지구사의 요구에 의한 것 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정말 그런것 인지? 만약 지구사의 요구였다면 그 의도 는 대충 짐작할수 있을것 같긴 하다.(과거 당대 최고의 가수들만 불렀다는 이곡을 울오빠께 부르시게 하므로 이시대의 최고 의 가수는 '조용필' '이다.라는 메세지를 어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