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 (황성의 적 / 荒城의 跡) - 이애리수 / (1928) (가사)

황성옛터 (황성의 적 / 荒城의 跡) - 이애리수 / (1928) (가사)

Music with lyrics (가사 첨부) (가사) 황성옛터 (황성의 적 (荒城의 跡))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어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의 적〉(荒城의 跡), 또는 〈황성옛터〉는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1928년 발표된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의 대중가요로, 한국인이 첫 번째로 작사와 작곡을 한 대중가요이다 이애리수가 신일선 다음으로 〈황성옛터〉를 부르기 시작하고, 〈황성옛터〉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배우로 활동했던 이애리수는 〈황성옛터〉를 단성사에서 불렀는데 관객들은 이애리수에게 함성을 보내는 동시에 망국의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불리게 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이 곡을 금지시키고, 부르는 조선인을 족족 처벌하였으나,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대한 맞섬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된다 이후 1932년 이애리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레코드로 〈황성옛터〉를 취입하였고, 1개월 동안 5만장이 판매되었다 당시 레코드와 유성기가 서민들의 물건이 아닌 것을 감안했을 때, 이는 5만장보다 더 큰 가치이다 〈황성옛터〉의 파급력은 다음해인 1933년까지 계속된다 1933년에 이애리수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배우 겸 가수였던 이경설은 〈고성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황성옛터의 가사를 그대로 가져와서 불렀으나, 〈황성옛터〉를 부르는 것이 금지가 되었듯이, 〈고성의 밤〉은 발매 즉시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처분되고 회수당하기도 하였다 〈황성옛터〉는 이애리수의 인기까지 드높이게 했는데, 이애리수의 명성이 떨어지고, 이난영, 왕수복, 선우일선 등 신예 가수들이 대거 연예계에 뛰어드는 1935년에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10대 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을 때,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1년이 넘었음에도 1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